게릴라 걸즈 - 성차별, 인종차별을 고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여자들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옷을 벗어야만하는가
From /www.guerrillagirls.com

게릴라 걸즈 - 성차별,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익명의 예술가 모임

익명의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인 게릴라 걸즈는 털많고 험상궂은 고릴라 마스크를 쓰고 미니스커트와 하이힐 차림으로 포스터, 스티커, 책자, 전시회등의 매체를 통해 여성차별과 인종 차별을 고발한다.

주로 미술, 영화등 예술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들의 활동은 정치, 사회분야에서의 일반적인 성차별과 인종차별등의 이슈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개인이 아닌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그들은 가면을 쓰고 익명으로 활동하며 그 가면은 예쁘고 부드러운 여성의 이미지에 상반되는 거친 이미지의 고릴라이다. 여성차별과 인종차별등 사회 부정을 고발하고 토론하기 위해 그들은 거침없는 유머와 파격적인 이미지를 사용한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현대미술 섹션에서 여자 미술가는 5%도 채 안되는데 누드화의 85%는 여자라는 사실을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에 화난 고릴라 마스크를 씌워 날카롭게 풍자하는 이 이미지는 그들의 고발방식을 잘 드러내준다.

게릴라 걸즈는 198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는 예술가를 초청하여 진행한 An International Survey of Painting and Sculpture라는 전시를 계기로 시작이 되었다. 게릴라 걸즈를 창설한 Kathe Kollwitz와 Frida Kahlo는 이 전시의 참여 예술가 중 여성예술가는 단 13명뿐이었으며 모두 미국와 유럽 출신의 백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미술계에 여성과 소수인종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 꺼리낌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들을 Women이 아닌 Girls로 지칭하고 불쑥 정곡을 지르는 공격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게릴라라고 부르며 포스터와 스티커등을 만들어 그들의 의견을 퍼뜨려가기 시작했다.

1985년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2005년 현재까지 백여장 이상의 포스터와 스티커, 여러권의 책자, 버스, 광고판, 잡지, 세계 곳곳에서의 전시회등을 통해서 그들만의 기지와 유머로 성차별, 인종차별, 낙태, 전쟁등의 문제를 여론화해왔다.

그들이 시작했을 때보다 예술계에서 여성의 지위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미술관이나 경매시장등에서는 백인 남성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즐겨 인용하는 페미니즘을 근간으로 앞으로도 언제나처럼 강하게 활동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Posted under 살사리꽃 on Tuesday, July 17th, 2007 | No Comments »

2007년 로스앤젤레스 마라톤

2007년 3월 4일 로스앤젤러스 22회 마라톤 (LA Marathon)

잠을 한숨도 못 잤다. :-(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침대로 올라 수십번 잠을 청한 것 같은데 매번 실패했다. 나의 뇌는 무슨 각성제라도 먹은 것 마냥 아주 말똥말똥했다. 아니, 일부는 아주 뚜렷하게 깨어있고 나머지는 멍한 상태로 깨어있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밤새 잠을 못 잤으니 ‘몇 시에 졸린 눈을 비비고 깨어났다’라는 말도 할 수 없다. 그래도 거실의 창가리개를 걷으며 마라톤 날을 맞이하는 혼자만의 행사를 의미있게 진행한다. ‘잘 뛰어보아야지.’

다음은 아침을 먹을 시간이다. 처음 두 세 시간을 지탱해줄 탄수화물 공급 시간, 피로가 쌓여서인지 입맛도 없다.

어제 마켓에서 사 놓은 약밥을 입에 넣었다. 아, 약밥이 독밥같았다. 이상야릇한 맛과 깔끔하지 않은 단 맛이 지들만의 궁합을 맞추어 정말 형편없는 맛을 만들어낸다. 차라리 작년처럼 절편을 먹고 말 것을…

6시에 남편을 깨운다. 등번호, 옷, 모자, 시계 등 여러가지 용품을 다시 한 번 챙긴다. 선블락 크림을 바르고 6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유니버셜 시티(Universal City)역은 사람들로 북적일까봐 한 정거장 덜 간 노스 할리우드(North Hollywood)역에 차를 주차시킨다. 마라톤 주자는 오늘 매트로 전철 요금이 무료다. :-)

전철에는, 엑스포에서 나누어준 비닐 비옷을 입고 새벽의 한기를 달래는 마라토너들이 많이 보였다.

유니버셜 시티역의 마라톤 출발 지점은 짐작대로 인산인해였다. 혹시라도 몰아닥칠 졸음이 걱정되어 멀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왔더니 역시나 화장실이 가고 싶다.

다른 것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바로 간이화장실에 끝없이 늘어진 줄의 꼬리를 찾아간다. 30분을 기다렸다. 달리는 사람이 2만 5천명이니 이 정도면 양호한 것인가.

볼 일을 보고 나니 얼추 출발 시간이다. 남편이 출발 지점 가까이까지 같이 걸어가주었다. 사진도 찍고 남편과 정다운 인사도 나누었다.

8시 15분 출발로 되어있는데, 작년과 달리 그 즈음에서 총소리나 미국 국가가 들리지 않았다. 다시 10여분 이상을 기다리니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조금씩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함성에, 이제 마라톤을 뛰는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출발점을 밟은 것은 8시 36분이었다. 인터넷으로 확인한 경사도와는 달리 처음 2마일 언덕길은 그렇게 가파르지 않았다. 물론, 초반이었으니 그렇게 느꼈으리라. 조금 걱정을 했지만 무난하게 2마일까지 오르막길을 달렸다.

2마일 근처에서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몇몇 사람들이 다시 좋아라 고함을 지른다. 이제 겨우 얼마 뛰었다고 내리막길이 이리 반가운지… 사람들에 치여 속도는 낼 수 없었다. 오히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 애를 쓰며 달려야 했다.

안내지도와는 달리 3마일이 되어서야 급수대가 나온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아침 제대로 물을 마시지 못 해 첫 번째 급수대가 그저 고마웠다.

처음 3마일 정도는 고속도로와 산길을 달려서인지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나무를 보는 것도 좋지만 다채로운 멋은 작년보다 덜 했다.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왜 코스를 바꾼 것일까. 답없는 질문에 머리를 굴려본다.

4마일에서 물과 게토레이를 열심히 마시고 카홍가(N. Cahuenga) 거리를 달려 한인타운 근처로 내려온다. 작년에는 20마일 근처에서 달렸던 항콕 팍 근처가 지금은 6마일 지점이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괜찮았다. 작년같은 발랄함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로스모어길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한인타운을 지나간다. 5년 반을 살며 늘 다니던 6가 길을 두 발로 달려본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반갑고 정겨웠다. 하지만, 무조건 완주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주변에 많은 시선을 주지는 못 했다.

한인타운의 대표 거리 올림픽 거리를 달리니, 한복을 차려입은 응원객들이 열심히 성원을 해 준다.

9마일이 조금 지난 후 후버길로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여기서부터 많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어느 거리를 달리는 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벌써부터 무릎 관절이 아파왔던 것이다. 작년 마라톤에서는 아마 23마일 근처에서 느꼈던 통증같다. 근데 겨우 10마일 정도 달린 것 같은데…

제대로 훈련을 못 한 점과 마지막 훈련을 너무 대책없이 했다는 점등, 어리숙게 이 마라톤을 준비한 것 같아 갑자기 상심이 되었다. 작년, 첫 마라톤 목표가 완주였는데,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올해는 기록을 깨는 것이 정석이건만, 작년처럼 다시 완주가 목표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열심히 응원해 주었지만 갑자기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우선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보자고 나를 달래야했다. 26.2마일이 목표가 아닌, 먼저 13.1마일이 목표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달리기가 조금 쉬워졌다. 드디어 중간 지점이다. 꼭 2시간 10분이 걸렸다. 딱 1마일에 10분 페이스이다. 딱 작년 속도이다.

중간을 지나서는 계속 1마일 단위로 목표를 잡았다. 도저히 13마일을 목표로 잡을 수는 없었다. 또 급수대에서 물을 마실 때마다 10초에서 20초정도 걸어주었다. 약해지는 내 모습이 정말 싫었지만 물을 마시느라 걷다보니 다시 뛰기 시작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중간에 캘리포니아 대학을 지난 것을 빼고는 17마일까지는 어디인지도 모르고 달리기만 했다. 중간 중간 재미있는 공연도 있었는데, 시끌법적한 소리에 잠깐 고개만 돌렸을 뿐이다. 제대로 기억에 남길 여력이 없었다.

중간 지점쯤에서 한 응원객에서 받아둔 스니커즈 초콜렛 바가 생각이 났다. 스니커즈가 갑자기 숨겨둔 에너지를 주는 듯 했다. 약간 기운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스니커즈의 이런 도움에도 불구하고, 17마일을 지나서 18마일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여기서부터 1마일에 10분 페이스로 달리는 것이 힘들어져갔다. 그것보다 약간 빠른 페이스로 계산해서 남편이 19마일 지점에서 기다리기로 했는데 18마일을 가기도 전에 그 시간이 지나버렸다.

18마일 지점에서 스프린트 서비스를 이용해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늦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남편과 만날 지점을 다시 확인하고 19마일까지 열심히 달렸다.

물과 게토레이를 마신 후에는 이제 스트레칭도 해 주었다. 작년에는 스트레칭 한 번 없이 다 뛸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또 의기소침해지려는 듯 했다.

기둥에 기대 같이 스트레칭을 하는 다른 주자들을 보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기로 한다.

19마일 조금 못 가서 남편을 만났다. 내 이름을 적은 종이를 들고 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고 너무 고마웠다. 남편에게 허리에 묶어맨 작은 주머니를 건네주고 바나나를 챙겨 받는다. 이제 이 바나나와 따로 꺼내둔 건포도가 전부다.

이제 점점 더 힘들어져 갔다. 마라톤이 이렇게 힘들구나는 처절하게 느꼈다. 무릎이 너무 아파 급수대마다 1분여 스트레칭을 해 주었는데도 나아지지를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원봉사대가 들고 있는 바세린을 흠뻑 무릎에 발라본다. 신기하게도 잠깐 고통이 싹 가신다. 바세린에 이런 효과가 있었다니…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애용하는 구나…

끌다시피하며 1마일 1마일을 달려간다. 15마일부터 계속된 오르막길은 당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급수대에서 걷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간다. 자원봉사대 청소년들과 응원객들이 내 등번호를 보고 힘차게 이름도 불러주는데, 정작 나는 웃어줄 힘도 없다.

22마일을 지나고 조금 달려가니 정말 보고 싶지도 않는 오르막길 다리가 나온다. 처음 2마일까지의 경사도보다 더 급한 언덕이었다. 그 다리를 보는 순간 옆에서 달리는 한 아저씨가, ‘저긴 달려서 안 갈 거야’라고 한숨 섞인 말을 내뱉는다. ‘제 말이요…’라고 맞장구를 치고, 조금 더 달린 후 나도 드디어 걷는다. 아, 이렇게 해서 뛰어서 완주는 못 하는구나.

중간을 지날 때는 그래도 1마일에 10분 페이스로만이라도 하자꾸나라는 야무진 희망이 있었는데, 어느덧 내 소망은 4시간 30분으로 되어 있었다.

걷는 걸음도 빠르지 않아 다리 언덕을 지날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추월해갔다.

이렇게 걷다가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다리가 끝나기전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뛰어도 다음 마일 알림 현수막이 보이지 않는다. 응원하는 사람들도 없고, 달리는 동네도 외딴 곳 같다. 여기는 전혀 와 볼 것 같지 않은 지역이었다.

24마일에서 25마일사이에서 또 한참을 걸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는 마라톤이다.

그래도 마지막 1.5마일 정도는 계속 뛰었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더 내기 위해 입을 악 물고 뛰었다. 이제 시간은 포기했다. 뛰어서 끝내자라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남편이 종료 지점 200미터 못 미치는 곳에서 나를 보았다는데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나는 지리하게 달리기만 했다고 한다. 남편도 인정했다. 내가 참 비참하게 달리는 것 같았다고…

마지막 0.2마일마저 힘들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마지막인 것이다.

피니쉬 라인의 칩 기록판을 밟는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황홀했다. 드디어 끝이다.

완주 시간 4시간 43분.

참 부끄러운 기록이지만, 그래도 완주했다는 마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두 번째 마라톤, 배운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은 마라톤이었다. 많이 실망도 했지만, 그래도 뛰어서 좋았던 마라톤이었다.


  Posted under 달리기/마라톤 on Saturday, March 31st, 2007 | No Comments »

2006년 로스앤젤레스 마라톤

로스앤젤레스 2006년 마라톤

오늘은 2007년 1월 7일 일요일이다. 2006년 3월 19일에 있었던 LA마라톤 후기를 이제야 쓴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순전히 차일피일 미루는 못난 습관때문이다. 다음 마라톤이 채 두 달이 남지 않았는데 차라리 2007년 마라톤 후기를 쓰면 되지 않냐고 자문도 한다. 하지만 내 생애 첫 마라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부끄럽지만 지금이라도 후기를 쓰고 싶다.

마라톤이라는 단어을 처음으로 내 피부로 느낀 것은 고등학교 1학년때였다. 올림픽 게임에서나 듣던 마라톤은 나와는 아주 동떨어진 개념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리는 약간은 괴짜스러운 운동이었을 뿐이다. (그 먼 거리를 왜 뛰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난 도저히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별 신경쓰지 않는 이상한 운동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내가 제일 존경했던 선생님께서 마라톤을 했다고 하셨다. 작은 나보다도 훨씬 작은 체구에 군살 하나 없는, 아주 야무진 분이셨다. 그 분에게서 마라톤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만이 하는 운동이 아닌, 의지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분으로 인해 마라톤은 내게 큰 도전이 되었다. 언젠가는 꼭 한번은 뛰고 말리라.

그 도전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현실이 되었다. 살다 보니 그 때의 친근감은 또 사라졌다. 마라톤은 고사하고, 5km, 10km도 제대로 뛰지 않는, 아니 그 이전에 달리기, 혹은 운동이라고는 좀처럼 하지 않고 십몇년을 더 살았다. 쇼핑다니느라 한나절 내내 걷고는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남편이 달리기를 한다고 나갈 때면 달리기따위를 왜 하냐는 몰상식한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가 운동이 필요해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래도 한 20여분 잠깐 달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남편과 같이 달리기를 하고 5km, 10km 대회에도 나가게 되었다. 그제서야 선생님이 해내셨다는 마라톤이 생각났다. 뛰고 싶었다.

하지만 2005년 오렌지 카운티 라구나 힐즈(Laguna Hills)에서 Saddleback 하프를 할 때도 마라톤은 겁이 났다. 그 하프가 유달리 언덕이 많아 힘들었기 때문에 더 의기소침해진 것 같다. 하프의 기록이 처음 도전 치고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 도시 이름조차도 달리기 중 넘었던 힘겨운 언덕을 제대로 말해주지 못 한다. 그래도 많은 언덕길을 달려 1시간 56분에 첫 하프를 해 냈으니 이론적으로는 나름 자신감도 생길만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라톤은 영 안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잠잠해졌다. 5km, 10km달리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가 아니면 안 되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6년 LA마라톤을 뛰겠다고 결심했다. 목표는 기록이 아니라, 걷지 않고 완주하는 것.

2005년 12월 훈련은 아주 엉망이었다. 뉴욕에도 다녀오고, 연말이라 여러가지로 어수선해 주말 일정이 늘 망가지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훈련은 1월부터 했다. 다행이 월초에 하는 다른 해와 달리 2006년 마라톤일은 3월 19일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생긴 것이다.

본격적인 훈련이라고 해도 절대 무리해서뛰지는 않았다. 장거리도 세 시간을 한번 뛰어 본 것이 전부이다.

이런 훈련이었으니 마라톤이 열리는 당일이 되자 조금 겁이 났다. 이렇게 엉성하게 준비하고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다치지 않고 뛰어낼 수 있을까.

아침은 그 전날 가주마켓에서 사 둔 절편을 먹었다. 무리해서 먹지 않고 들어가는 만큼만 먹었다. 교통 대란이 예상되어 차는 그대로 두고 노망디에서 전철을 타고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전철이 바로 근처에 있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혹시나 엠먀뉴엘을 만날까 싶어 그가 친구들을 만났다는 호텔 로비로 가 보았다.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로 북적대는 다운타운에서 그 로비는 대기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그냥 그 로비 바닥에 눌러 앉았다. 옆에서 응원해주는 남편과 농담도 하고 몸도 풀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곧 출발 시간이다. 남편과 인사를 하고 출발선으로 나선다. 엘리트 선수들과 서브 주자들이 먼저 서고 나와 같은 느린 주자들은 제일 마지막이다. 출발선을 밟기까지 10분이 더 걸릴거라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 친구나 그룹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들떠서 마라톤 애기를 한창 벌이고 있다. 조금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곧 나 자신을 달랜다. 어차피 나와 하는 게임이다. 가장 외롭고 힘든 싸움인 거라고 마음을 다스린다.

미국 국가도 불렀던 것 같다. 10개월이 다 되어가니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하여간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무슨 음악이나 연주로 꽤 요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이다. 내 인생의 첫 번째 마라톤. 달린다는 느낌보다는 빠르게 걷는다는 느낌으로 사람들과 같이 움직인다. 그러다가 조금씩 발걸음이 빨라진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나보다. 추위를 달래기 위해 걸쳤던 옷을 버리고 달려나간다. 양 옆의 거리는 응원하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어 보인다. 저 어디에 남편이 나를 응원하고 있겠지.

다운타운을 빠져가는 것은 재미있었다. 들떠 있는 주자들, 각가지 재미있는 방법을 고안해 응원을 하고 있는 사람들, 정말 흥겨운 출발이었다. 창이 아주 넓은 멕시코 모자를 쓰고 커다란 멕시코 깃발을 들고 사람들을 응원한 한 아저씨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조금 지나니 한번도 가지 않는 LA의 각 동네들이 나온다. 흑인들이나 라티노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치안이 좋지 않다고 알려진 동네들, 하지만 우리가 지나가는 부분은 아주 깨끗했고 응원나온 사람들도 정말 친철했다.

그 때 달렸던 피규로라 길(Figueroa St), 마틴 루터 길(Martin Luther Blvd), 엑스퍼지션 길(Exposition Blvd.), 모두 자주 가는 길이 아니다. 그렇게 내 발로 뛰면서 밟아보니 참 좋았다.

5km가 지나서는 물이나 게토레이가 서비스될 때마다 꾸준히 마셔두었다. 베니스 거리였던 것 같은데 한 라티노 아주머니가 딸아이과 같이 바나나를 앙증맞게 썰어놓고 지나는 주자를 격려해주었다. 평소 훈련 때도 바나나 위주로 먹었던 지라 고맙게 바나나를 받았다. 그 때 그 예쁜 꼬마 아이의 미소가 너무 만족스러보였다. 정말 고마웠다.

하프에 가기까지는 이렇게 긴장을 푼 채로 천천히 달렸다. 다행히 별로 아픈 곳도 없이 양호한 컨디션으로 하프를 지나갈 수 있었다. 다만 바나나와 선글래스를 받기 위해 약속했던 하프 지점에서 남편을 만날 수 없었다. 입고 있던 셔츠도 주고 선글래스도 받고 싶었는데 아마 남편이 늦나 보다. 아마 베니스 주위에 차가 많이 막혔나보다. 무엇보다 바나나를 받지 못 해 아쉬웠다. 바나나는 주최측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응원하는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라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최측에서는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젤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나나를 못내 기다리고 있었는데 할 수 없었다.

대신 베니스에서 우회전을 해 라시네에나가로 올라가는 지점에서 크리스를 만났다. 크리스가 나올 줄은 정말 기대하지 않았다. 미안했지만 그에게 땀에 젖은 셔츠를 부탁하고 계속 달려갔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일찍 와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일찍은 아니었다. 하프를 지나고나서야 내가 정말 천천히 뛰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완주하는 것도 좋았지만 다섯 시간까지 걸리는 것는 또 싫었다.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마침 경사도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피코를 지나고 샌 빈센테등, 정확히 어디가 언덕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15마일 지나서는 한참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다리에 쥐가 난다거나 걸어야한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힘든 언덕이었지만 계속 달리면서 뛰어갈 수 있었다.

다행히 6가에 들어서면서 언덕은 많이 완화되었다. 로스모어와 3가 어딘가에서, 20마일과 22마일 사이에서, 영화 클럽 씨네라 회원들을 만났다. 너무 고맙게도 응원을 나와주었던 것이다. 정말 고마웠다. 난 그들이 너무 반가워서 멀찌감치서부터 손을 흔들어댔다. 잠깐 제자리 달리기를 하면서 인사를 하고 핸드폰을 빌려 남편과 통화를 했다. 차가 많아 막힌다고 한다. 씨네라 회원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뛰기 시작한다. 20마일이 넘은 지점이어서 막막하지는 않았다. 이제 몇 마일만 가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대회측에서 오렌지도 많이 주었는데 난 계속 바나나 생각이 났다. 조금 달리다보니 한 여자가 바나나를 손에 들고 있다. 그걸 받을려고 손을 뻗치니 그 사람이 날 의아하게 쳐다본다. 아, 아무 주자가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기다리는 사람을 위한 것이구나. 그래도 손을 뻗치고 간곡하게 달라는 눈짓을 보내는데 웬만하면 줄 것을… 그 사람들이 조금 야속했지만 나무랄 것도 없었다. 바나나가 모자랐나보다.

다행히 윌튼 길에 응원나온 한 한인 그룹에서 바나나를 건네준다. 너무 고마웠다. 너무 고마워 당장 회원으로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다.

올림픽 길에 들어서서는 아주 힘들어졌다. 이제 2마일정도 남았다. 그 넓은 올림픽길을 다 막아놓았는데 초반과는 달리 그 길을 메꿀 만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의 사람들도 모두 지쳐있는 표정이다. 걷는 사람들도 꽤 된다. 아주 경사진 언덕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언덕길이었다. 24마일 이상을 달렸으니 평지도 언덕같은데 왜 여기에 이런 복병을 두는 것인지. 괜히 마라톤 코스를 정한 사람을 원망해본다.

한인들과 라티노 몇몇이서 태극기를 나누어준다. 골인에 가까워서야 그 태극기를 받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2007년 마라톤에서도 그렇게 나누어준다면 꼭 받아서 손에 쥐고 들어가겠다고 결심해본다.

드디어 플라워 거리에서 마지막 좌회전을 한다. 여기서부터는 알 수 없는 힘이 생기는 듯 했다. 틀림없이 큰 소리로 응원해주는 사람들 덕분이리라. 그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이제 와서 경쟁한다는 것이 조금 우습지만 내 바로 앞의 주자를 앞지르기로 마음을 먹는다.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 쓴다는 말을 처음으로 느껴본다.. 악을 쓰며 그 사람을 앞질렀다. 10미터, 5미터, 그리고 마지막 한 발, 들어오는 주자의 이름을 불러주는 아저씨가 내이름은 쑥 빼버린다. 뭐, 원망할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난 해 냈다는 것이었다. 내가 원했던 것처럼 걷지 않고 달려 냈다. 중간에 화장실 한 번, 남편에게 전화 한 통 보내는 사이만 잠깐 멈추었을 뿐이다. 4시간 19분. 썩 좋은 기록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척 기뻤다.

달리기 전까지만 해도 해낼수 있을까라고 마구 의심했었는데…

난 갑자기 모든 것이 고마워졌다. 그리고 살아서 이렇게 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첫 마라톤이어서 그런가. 마음이 이렇게 격정에 가득 찬다.


  Posted under 달리기/마라톤 on Sunday, January 7th, 2007 | No Comments »

아이리스 챙(Iris Chang)의 난징대학살 (The Rape of Nanking)

Iris Chang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무료 마일리지로 받아보게된 Time지 덕택이었다. 쌓여가는 Time지를 보며 영어 공부에 대한 나의 허망한 시도에 한숨을 내쉬며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그 날도 가벼운 마음으로 11월 22일자의 Time지를 집어들었고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 하면서도 무작정 페이지를 넘겨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Iris Chang의 자살 소식을 읽게 되었다.

부고란에서 그녀의 밝은 미소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 사진이 분류가 잘못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었다. 그녀의 웃음은 크진 않았지만 적어도 삶에 대한 긍정이 우러나는 잔잔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서 가장 먼저 희망을 보았기에 들어보지도 못 했던 이 여성의 자살 소식은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를 던져주었다. 성공한 역사학자의 자살 소식은 감성적으로 들리게 마련이고 나 또한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The Rape of Nanking: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의 저자 Iris Chang. 그녀는 The Rape of Nanking을 통해 1937년 12월 중국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야만적인 학살행위를 공식적인 문서와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서 전세계에 고발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역사에 대한 상세한 서사는 그 과거를 무시해온 전 세계를 준엄하게 꾸짖는 듯하다. 전후 전범재판소의 발표에 따르면 26만명, 많은 역사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3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 끔찍한 학살이 왜 그리고 어떻게 자행되었는지, 그 참혹한 학살 후 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녀는 냉철하게 분석해낸다. 중요성이 잊혀진 이 학살에 대해, 그 진정한 해결을 위해, 어느 역사가도 해 낸 적이 없는 용기있는 접근을 한 것이다.

학살의 주체, 일본을 준엄한 역사의 재판위에 다시 올리기 위한 그녀의 이런 시도는 물론 쉬운 것이 아니었다. 60년 넘은 세월 속에서 생존자들의 증언이 점점 더 귀해진다는 점, 아시아, 유럽, 북미등에서 고의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없어져가는 증거들을 찾아내야 했다는 점, 그런 증거들과 증인들을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인터뷰해야했다는 점,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끔찍한 학살행위 자체에 대한 개인적인 상실감을 접어두고 빠짐없는 서술해야했다는 점등 이런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그녀는 해 낸 것이다. 과거를 은폐하기에 급급할 뿐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전범자들에 대한 신사참배가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는 일본의 신군국주의에 대해 전 세계에 엄숙한 경종을 울린 것이다.

어렵게 구한 그녀의 한글판 The Rape of Nanking (난징대학살)을 참으로 힘들게 읽고 나서야 나는 그녀의 자살 소식을 접했을 때 멋모르고 던졌던 질문에 몹시도 부끄러워졌다. “성공한 역사가의 자살”이라는 매스컴에 훈련된 나의 선정적인 호기심. 그녀의 책을 수십번 눈을 감고 멈추어가면서, 그 잔학성에 치를 떨면서 읽어내고 나서야 나의 세속적인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던가를 알 수 있었다.

밝은 웃음이 잘 어울리는 듯한 그녀가 왜 한창의 나이에 자신의 삶을 거둘 수 밖에 없었는지, 진정 활동하는 역사가로서, 역사의 어둠을 용감하게 드러낸 작가로서, 딸과, 아내와 부모로서의 모든 인연을 끊고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길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들.

이런 질문들은 아주 중요한 질문들이다. 특히 살아있는 그녀의 가족, 친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상처만큼이나 큰 질문이 될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독자인 나는, 뛰어난 인재로서의 그녀의 자살 소식은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이제서야 알게 된 그녀의 훌륭한 역사서를 그 자체로서 평가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책을 써낸 그녀의 업적 자체를 우러러야할 것이다. 단지 그녀가 이쁜 사진으로 Time지의 부고란을 장식한 30대 성공한 역사가여서가 아니라…

책을 써가면서 그녀가 겪어야했던 상처와 고뇌와 눈물이 그녀의 몫이었다면 그 소화하기 힘든 책을 읽어낸 한 독자로서의 나의 몫은 그런 과거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게, 그런 과거에 대해서 정당한 조취가 취해지도록, 그녀가 전하려 한 메세지를 조금이라도 더 활동적으로 실천하기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책을 쓰는 내내 그녀가 새겨두었다는 경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문구를 나도 마음에 담아두고서.


  Posted under 살사리꽃 on Tuesday, January 2nd, 2007 | No Comments »